1. 단어가 무거운 날, 기록은 그림이 된다
기록은 반드시 단어로 이뤄져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일기장을 조용히 닫아버렸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날,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레 기록을 멈추곤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감정이라는 것은 언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무언가다.
그럴 때, 오히려 단어가 아닌 ‘그림’이 기록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림이 아니여도 그날 내가 찍었던 사진이여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림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전문적인 스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몇 줄의 선, 원과 세모 같은 도형, 간단한 아이콘이나 표정 하나도 훌륭한 기록이 된다.
예를 들어 하루 종일 무기력했다면 납작하게 주저앉은 사람을 그려볼 수도 있다.
마음이 답답했다면 나선형 선을 빽빽이 그려보는 것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림을 잘 그리는가'가 아니라, '지금 나의 상태를 표현하고자 하는가'이다.
이러한 비언어적 기록은 오히려 마음의 무게를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언어는 때로 명확함을 요구하지만, 그림은 애매함과 모호함을 그대로 받아들여준다.
단어로는 불가능했던 감정의 형상을 그림은 조용히 받아 적는다.
그림 일기 혹은 감정 스케치북이 점차 늘어날수록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자기 표현에 익숙해지고,
그 과정 속에서 자존감을 회복하게 된다.
2. 색이 감정을 대변할 수 있다면
하루의 기분을 설명하는 데 가장 직관적인 도구는 ‘색’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떠올릴 때 자주 색과 연결 짓는다.
기분이 우울할 땐 회색이나 남색, 마음이 가볍고 밝을 땐 노랑이나 연두 같은 색이 먼저 연상된다.
그렇기에 다이어리에 색을 입히는 것만으로도 감정은 충분히 기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일의 감정을 색으로 표현하는 ‘무드 트래커’는 색 기록의 대표적인 예다.
간단한 달력 모양에 그날의 기분을 색칠해보는 것만으로도 한 달간의 심리 상태가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굳이 그날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빨강이 연달아 등장하는 시기를 보면
'무언가 감정적으로 격동의 시기였구나'라는 인식이 가능하다. 또한 색은 기억을 감각적으로 남긴다.
평범했던 하루도 노란 배경에 '햇볕 좋은 날'이라는 제목만 붙이면 따스한 기억으로 남는다.
이처럼 색은 단순한 미적 요소를 넘어, 감정의 온도와 농도를 시각화하는 언어가 된다.
기록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색을 칠해보자.
아무 의미 없어 보이더라도, 그 색은 그날의 당신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그 페이지를 펼치면, 그 색은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그날의 나는 이랬어." 언어는 잊혀져도 색은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3. 도형과 상징으로 나를 표현하는 연습
우리는 모두 상징에 익숙하다.
하트는 사랑, 구름은 우울함, 태양은 활기찬 에너지, 시계는 시간 압박.
일기장에 이러한 도형과 상징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의 상태를 짧고 간결하게,
그러나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루를 다섯 개의 도형으로 정리해보는 방법이 있다.
원은 안정감, 삼각형은 긴장감, 사각형은 일상적 안정, 물결선은 감정의 흔들림,
지그재그 선은 스트레스를 나타낸다고 정하고 매일 페이지에 그려보는 것이다.
매일 도형의 비율이 달라지면, 내 감정의 흐름 역시 자연스럽게 가시화된다.
이러한 기록 방식은 감정 인식 능력, 즉 ‘감정 리터러시’를 향상시킨다.
스스로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더 자주 자각하게 되며, 나의 반응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도 된다.
이는 단순한 자기 표현을 넘어, 스스로의 내면을 읽고 다독이는 능력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이러한 도형 기반의 일기 쓰기는 반복성과 단순성을 가지기 때문에 꾸준한 기록에 유리하다.
복잡한 문장을 고민할 필요 없이, 익숙한 기호 몇 개만으로도 ‘오늘의 나’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은 흔적들이 쌓였을 때, 우리는 말이 없어도 충분히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갖게 된다.
맺으며: 말 없는 기록도 충분히 말이 된다
기록은 말이 많아야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침묵도 표현이고, 선 하나도 메시지가 된다. 그림과 색, 도형은 언어 이전의 감각적 언어이며,
그 언어는 때로 가장 정직하고 직접적으로 마음을 반영한다.
우리는 항상 말을 잘할 수 없고, 언제나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날들에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느끼고 있으며, 존재하고 있다.
다이어리 속에 남겨진 작고 서툰 그림, 흐트러진 색, 익숙한 기호 몇 개는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이자, 언어보다 깊은 곳에서 건져 올린 마음의 조각들이다.
그러니 단어가 없어도 괜찮다. 당신의 감정은 이미 충분히 이야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