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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페이지의 용기: 아무것도 쓰기 싫은 날, 어떻게 기록할까

by 시고르레코드 2025. 5. 3.

1. 아무것도 쓰기 싫은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다이어리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펜을 들었지만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고, 쓰고 싶은 마음조차 나지 않는 날. 머릿속은 텅 빈 듯하지만,

그 속엔 형언할 수 없는 피로와 무기력이 들어차 있다.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굳이 오늘을 기록해야 할 이유도 찾기 어렵다.

그러다 결국 빈 페이지 하나를 넘긴 채 다이어리를 덮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런 날이야말로 사실은 다이어리가 가장 필요한 순간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불안, 그리고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은 대개 조용히 쌓여간다.

 

그럴수록 사람은 자신을 더 멀리 밀어내고, 빈 페이지 앞에서 더욱 얼어붙는다.

 

기록을 ‘잘’ 해야 한다는 부담, 어떤 의미 있는 말을 써야 한다는 압박은 결국 다이어리 자체를 버거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실 일기를 쓴다는 것은 '매일 뭔가 쓸 말이 있을 때만 쓰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날은 ‘아무것도 쓸 말이 없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다이어리의 진정한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왜 쓰고 싶지 않을까?”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이미 당신은 자신을 돌보는 첫걸음을 내딛고 있는 셈이다.

 

 

2. ‘기록’이 아니라 ‘흔적’이라 생각해보기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표현은 종종 완결된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다이어리는 감정을 완성하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그날의 흔적만 남겨도 충분한 공간이어야 한다.

쓰기 싫은 날에는, 굳이 문장을 완성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단어 하나, 이모티콘 하나,

그날의 날씨나 기분을 그저 색으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기록’이다.

 

예컨대 “무기력함”, “피곤함”, “딱히 할 말 없음”이라는 짧은 낙서조의 문장도 귀중하다.

그 글자들은 오늘의 당신이 남긴 존재의 증거이며, 감정을 숨기지 않고 인정한 용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다채로운 글을 써야만 일기를 잘 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다이어리는 훨씬 자유로운 공간이 된다.

또한 ‘시각적인 기록’ 역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마스킹테이프를 붙이거나, 그날 본 풍경을 간단히 그려보거나,

좋아하는 스티커 하나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기록이 된다.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의 나를 무시하지 않고 마주하려는 태도다.

 

다이어리는 글자보다 마음이 먼저 담기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3. 비어 있음 속에도 나의 삶이 흐르고 있다

 

빈 페이지를 남겨둔 채 넘어갈 때, 괜한 자책이 따라올 수 있다.

(내가 이래서 무지노트에다가 기분따라 그려가면서 다이어리를 쓰는 것!)

 

우울해서 아무것도 생각 안난날 우울하다는 내용일 뿐이었던 그날의 일기

 

“왜 꾸준히 못 쓰는 걸까”, “결국 작심삼일이었네”, “나란 사람은 왜 이렇게 흐리멍덩할까” 같은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하지만 삶은 항상 뚜렷한 형체로 남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기록은 완전하지 않은, 비워진 자리 사이에 있다.

빈 페이지는 단지 기록하지 않은 하루가 아니라, 그날의 감정과 리듬이 반영된 또 하나의 '표현'이다.

침묵도 말이 되고, 비움도 표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다이어리와의 관계를 달리 맺게 된다.

다이어리는 어떤 성취의 증명이 아니라, ‘살아냈다’는 자취를 남기는 장소일 뿐이다.

 

오히려 다이어리 속의 빈칸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다.

"아, 저 때는 많이 지쳐 있었구나", "그 시기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 혹은 "그래도 그때 그 하루는 어쨌든 지나갔구나"라는 회고는 미래의 나에게 말없는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러니 가끔은 다이어리를 꾸준히 채우지 못한 자신에게도 관대해지자.

 

꾸준함은 기록의 목표가 아니라,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의 한 방식일 뿐이다.

다 쓰지 못한 날도, 조금만 쓴 날도, 아무것도 쓰지 않은 날조차도 모두 소중한 삶의 일부다.

 

 

맺으며: 쓰지 않음도 하나의 기록이다

 

 

다이어리를 쓰는 것은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자신과의 대화다.

 

그 대화는 항상 유창할 필요도, 풍부할 필요도 없다.

 

가끔은 침묵이 흐르기도 하고, 가끔은 단어 몇 개로 끝나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날이 찾아온다. 그럴 때는 억지로 채우기보다,

그 침묵 자체를 기록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다이어리란 결국 삶을 정리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보다는 삶을 ‘그대로 담는 그릇’이다. 지저분해도 좋고, 구불구불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당신이 당신의 삶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쓰지 않은 날의 빈 페이지도 결국 ‘살아 있었던 당신’을 증명해 준다. 그 자체로 충분하다. 그러니 다음에 다시 다이어리를 펼칠 때, 망설이지 않아도 된다.

 

완벽하게 쓰지 않아도 되고, 특별한 하루가 아니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며,

다이어리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줄 가장 조용하고 깊은 친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