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왜 쉽게 잊는가: 기억의 특성과 한계
인간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이는 신체적, 심리적 생존에 필요한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저장하는 뇌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뇌는 하루에도 수천 가지 자극을 받아들이지만, 그 중 극히 일부만을 장기 기억으로 보존한다.
대부분의 일상은 며칠이 지나면 흐릿해지고, 몇 달 후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특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는 날과 사건의 구분이 모호해지며,
시간이 지나면 마치 그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망각’은 인간에게 불편한 기능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은 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필수적인 생리적 과정이다.
불필요하거나 고통스러운 정보를 지속적으로 기억한다면 인간은 정서적 불안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망각이 종종 우리가 지키고 싶은 기억까지 앗아간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한 시기의 감정, 관계, 배움, 혹은 자신이 겪은 중요한 변화들이 시간이 지나며 잊힌다면,
그것은 단순히 정보의 손실을 넘어 정체성의 일부가 희미해지는 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로 구성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망각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기록’이다.
2. 기록은 기억의 외장 하드다: 글로 남기는 기억의 구조화
기록은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아두는 행위이다.
하지만 단순히 사실을 메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록의 핵심은 정보를 나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 있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가 기억을 강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 이유이다.
무작위로 지나치는 하루의 사건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하면, 뇌는 그 정보를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는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감정이 함께 담긴 글은 뇌의 해마뿐 아니라 편도체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단순한 정보보다 훨씬 더 오래 보존된다.
또한 기록은 기억을 ‘구조화’하는 기능을 한다.
흐릿했던 감정의 흐름, 모호했던 생각이 문장으로 정리되면서 분명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렇게 정리된 기억은 나중에 다시 꺼내 보기 쉬우며,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이는 단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맥락 속에서 현재를 재해석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기록은 일종의 ‘시간의 지도’를 만든다.
글의 날짜, 장소, 상황, 감정이 함께 기록되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듯 과거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좌표가 된다.
디지털 메모, 종이 다이어리, 블로그, 음성 녹음 등 기록 방식은 다양할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 방식이 나에게 ‘자연스럽고 지속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지속 가능한 것이 현재 나에게는 아날로그 방식이고 노트에 다이어리를 그려가며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써가는 방식인 것이다.
이렇게 지속함으로써 내 기록들이 천천히 쌓여가고 나를 컨트롤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듯 싶다.
3. 기록하는 삶은 무엇을 바꾸는가: 망각을 넘어 성찰로
기록은 단순히 정보를 저장하는 것을 넘어, 삶의 태도 자체를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꾸준히 기록하는 사람은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하루의 흐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습관이 생긴다.
이는 감정 조절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더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기록은 현재의 나를 관찰하는 일이고, 미래의 나를 위한 선물이다.
예컨대 오늘의 고민과 선택을 남겨두면,
몇 달 혹은 몇 년 후에 그것을 읽은 내가 당시의 판단을 돌아보고 성장의 방향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면 그 시간은 흔적 없이 지나가고 만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내가 그때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기록은 자신만의 기억 자산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소비하지만, 그중 내 안에 남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반면 내가 직접 적은 글은 내 경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훨씬 강력한 자산이 된다.
이를 통해 나만의 지식 기반, 감정의 역사, 삶의 맥락을 축적해 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 기록은 ‘시간이 사라지지 않도록’ 돕는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가는 것을 막고, 삶의 작은 파편들을 붙잡아 이야기를 만든다.
이처럼 기록은 망각과 싸우는 도구이자, 삶을 더 깊이 살아가기 위한 전략이다.
맺음말: 쓰는 사람만이 기억할 수 있다
‘기억하지 않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물론 모든 것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의도적으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무언가를 적는 행위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축적은 생각보다 깊고 넓은 자취를 남긴다.
기록은 단지 과거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더 온전히 살아내기 위한 의식적인 행위이다.
우리는 언젠가 오늘을 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쓴 한 줄의 기록은, 미래의 나를 그 시간 속으로 다시 데려다줄 것이다.
그러므로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이 있다면, 지금 써야 한다. 쓰는 사람만이 기억할 수 있다.